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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 코리아를 그리며 (1941.6.12.~2021.2.9.)

작성자 JAZZ PEOPLE(ip:)

작성일 2021-03-02

조회 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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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글 양수연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지난 2월 9일, 재즈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가 향년 79세 나이로 사망했다. 칙 코리아는 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열정적으로 온라인에서 연주와 교육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사망원인은 최근에 발견한 희소 암, 그러나 사망원인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가족이 전하기를 칙 코리아가 사망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단다. 


“제 음악이 빛나게 타오를 수 있게 도와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더 많은 예술가를 원합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고 작곡하고 공연하십시오. 그것은 아주 즐거운 일입니다.”


칙 코리아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테크닉으로 연결하는 것 이상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연주자였고 따라서 새로운 사운드를 갈망하는 후배 연주자들과 청취자에게 어마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재즈 마스터였다.


칙 코리아라는 텍스트는 다양한 스타일 구성의 ‘칙 코리아 카탈로그’로 제시할 수 있는데 연속적면서도 분절된 형식으로 존재하는 그의 작품들은 재즈라는 이름의 감각의 제국을 건설해 온 칙 코리아의 선진적인 음악 건축술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칙 코리아의 본명은 아르만도 코리아로 1941년 매사추세츠주 첼시에서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르만도 J 코리아(Armando J. Corea)라는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아르만도는 트럼페터였고 1930~1940년대 보스턴 지역에서 유명했던 딕시랜드 밴드의 리더였다. 코리아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4살 무렵 피아노를 접했고 8살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코리아는 디지 길레스피, 찰리 파커, 버드 파월, 호레이스 실버, 레스터 영 등 당대의 유명한 재즈 연주자들의 음악에 영향받으며 자랐고 특히 호레이스 실버에게 너무나 빠져있어서 고등학교 때에는 호레이스 실버의 곡만을 연주하는 트리오를 만들어서 공연하기도 했다. 뉴욕의 명문 컬럼비아대학에 들어간 후, 줄리아드스쿨로 편입했는데 버드랜드 재즈클럽에서 마일스 데이비스 연주를 들은 뒤, “대학에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라며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가 줄리아드에 간 것은 그가 뉴욕에 살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코리아는 1960년대 초에 몽고 산타마리아, 빌리 보노, 블루 미첼, 허비 맨, 스탄 게츠와 함께 연주를 시작했다. 데뷔 앨범 [Tones For Joan’s Bones]은 코리아가 25살이던 1966년에 녹음됐는데 우디 쇼(트럼펫), 조 패럴(테너 색소폰, 플루트), 조 챔버스(드럼)와 어쿠스틱 베이스를 연주하는 스티브 스왈로우의 능숙하고 흥미로운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스물다섯 살 피아니스트의 데뷔 앨범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복합적이고 토속적 기운을 가진 당대의 하드밥을 고급스럽게 세공하고 있는 저변의 실력을 들어볼 수 있다. 2년 뒤 드러머 로이 헤인스와 체코 출신의 베이시스트 미로슬라브 비투스와 트리오로 녹음한 두 번째 앨범 [Now He Sings, Now He Sobs]는 코리아의 초기 명반으로 손꼽을 수 있는 작품으로 하드밥 언어를 느슨하게 풀면서 도전적이고 밀도 높게 서로 소통하면서 곡마다 새로운 순간들을 만들어내면서 전위적인 얽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앨범이 전반적으로 온화해서 ‘Fragments’와 같은 곡들의 눈부신 전위성은 잘 드러나지 않는데 그럼에도 1968년에 나온 앨범 중 최고의 하나로 꼽고 싶다. 코리아-헤인스-비투스 트리오는 1982년 [Trio Music](ECM)과 1984년 [Trio Music Live In Europe]에서도 진가를 드러낸다.


비옥한 토지 위의 비범한 데뷔 앨범들([Now He Sings, Now He Sobs]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데뷔 앨범이 아닐까)로 골조 공사를 마친 칙 코리아는 다양한 색채로 블록 기술을 창조해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드 홀랜드(베이스)와 배리 알트슐(드러머), 앤서니 브랙스턴과 함께 서클(Circle)이라는 재즈 앙상블을 조직하여 ECM에 중요한 아방가르드 순간을 남겼고 마일스 데이비스라는 엄청난 클라이언트가 나타나 [In A Silent Way](1969), [Bitches Brew](1970), [Miles Davis At Fillmore](1970) 등 지칠 줄 모르는 마일스의 혁신적인 일렉트릭 사운드의 기록에 참여하게 했다. 


30대 초반의 칙 코리아는 새로운 재즈 시대를 개척하려는 마일스라는 파이오니아와 함께 강박적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새로운 일렉트릭 무브먼트의 리더급으로 재즈사에 주도적인 위치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재즈사에 영원히 기억될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퓨전 밴드 리턴 투 포에버(Return To Forever, 1971)는 그러한 배경에서 태어났고 그것은 건축가 칙 코리아의 창조적인 포트폴리오이자 그간 탐미해온 재즈의 유산을 리모델링하는 개척자로서의 길을 예고하는 작업이었다. 칙 코리아와 베이시스트 스탠리 클락(베이스)을 중심으로 브라질과 스페인 음악 요소를 끌어들여 플로라 푸림(보컬), 아이르투 모레이라(드럼), 조 패럴(색소폰)이 합류했고 레니 화이트(드럼), 알 디 메올라(기타)의 화력이 가세하는 1년 뒤에는 리턴 투 포에버는 칙 코리아의 퓨전 이데아로 부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이름이 되었다.



리턴 투 포에버는 명곡 ‘Spain’을 강렬하게 남겼다. 당시 칙 코리아는 길 에반스와 함께한 마일스의 [Sketches Of Spain] 앨범을 좋아했고 그러한 스페인의 감성을 자기 앨범에 넣고 싶었다.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스 협주곡’(Concierto De Aranjuez, 1939) 2악장의 테마를 차용하여 환상적인 재즈곡을 썼다. 그것이 작품 ‘Spain'이고 리턴 투 포에버의 또 다른 명성이 됐다. 코리아는 1972년의 첫 번째 버전의 ‘Spain’에 만족하지 않아서(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루해져서) 1985년에 오케스트라를 위한 색다른 편곡을 했는데 유튜브에 이 호화롭고 다채로운 ‘Spain’ 오케스트라 공연이 여럿 남아있으니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1980년대 재즈가 빛을 잃지 않고 그토록 찬란했다면 아마 존 패티투치(베이스)와 프랑크 갬베일(기타), 데이브 웨클(드럼), 에릭 마리엔탈(색소폰)로 시작한 칙 코리아의 일렉트릭 밴드에게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불타는 스윗 피킹의 몬스터 프랑크 갬베일, 전 세계 재능있는 청년들을 드럼의 세계로 이끌게 했던 천재 데이브 웨클, 베이스의 전설 존 패티투치. 칙 코리아 일렉트릭 밴드는 20년 넘게 이어졌는데, 칙 코리아의 펑키한 펜더 로즈 연주를 비롯한 각 연주자들의 놀라운 테크닉이 어느 순간 신선함을 잃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압도하는 비주얼 테크닉만으로도 상업적 가치가 훌륭했기 때문에 대중은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칙 코리아는 게리 버튼, 허비 행콕 등 코리아 세대의 재즈 레전드와 함께 세련미 넘치는 듀오를 만들어 전 세계에서 연주했을 뿐만 아니라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브라이언 블레이드, 아비사이 코헨, 제프 발라드, 스티브 윌슨 등 당대의 영 제너레이션과 함께 창의적이고 모범이 될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최근에도 ‘스페인’적 감각을 재현한 스페니시 하트 밴드(The Spanish Heart Band)와 트리오 그룹 비질레트(Vigilette) 등 다양한 스타일과 구성의 그룹을 이끌었다. 특히 스페니시 하트 밴드에는 니노 드 로스 레네라는 바일라오르(플라멩코 남자 댄서)를 영입해 대중적 감각 사운드의 절정을 보여줬다.


그의 뛰어난 클래식 연주 역량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모차르트와 쇼팽의 작품을 녹음했고 현악4중주곡을 작곡했다.


커다란 레고 블록을 쌓는 어린아이는 매뉴얼을 보려 하지 않는다. 호기심 가득한 눈을 끔벅이며 즐겁게 끼워 넣고 피스를 쌓아 올린다. 그 아이는 오직 충동으로 재미를 따라 움직인다. 칙 코리아의 크고 깊은 눈도 그런 아이의 모습을 닮지 않았던가? 니체가 말한 실존적 최고의 단계인 ‘아이의 창조성'은 이런 게 아니고 무엇인가.



“결국, 형식적인 스타일은 나중에 생각할 뿐입니다. 저의 모든 음악 활동은 창의적인 충동의 결과물입니다. 저는 재즈, 팝, 클래식 여부를 따지지 않습니다. 제가 고려하는 것은 도전적이고 흥미진진한 음악인지 아닌지입니다. 저는 충동에 이끌리고 충동을 따라갈 뿐입니다.” -1983년 〈뉴욕 타임스〉 인터뷰


골수 재즈 팬에게 사랑받으면서도 대중음악 분야 다양한 팬들을 보유하고 90여 장에 가까운 엄청난 양의 앨범과 셀 수도 없이 많은 공연을 수준 있게 유지하는 재즈 연주자가 얼마나 있었던가? 만약 팝 연주자가 전 세계 팬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앨범을 고차원적으로 제작하려했다면 대중음악 산업의 기획자와 거대 자본과 먼저 씨름을 해야 했을 것이다. 칙 코리아는 문화 산업에 미약하게 남아있는 예술에의 요구를 끌어오고 틈을 벌려 충동에 이끌린 채로 누군가와 상의할 이유도 없이 자신만의 감각의 제국을 또렷하게 세워놓았다. 골수 재즈 팬들도 그 안에서 놀았고 록 팬들도 그 안에서 놀았고 팝 팬들도 그 안에서 놀았다. 칙 코리아의 이름을 모르는 음악 팬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그래서 2021년 2월 9일, 칙 코리아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음악 팬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애통하기만 하다. 초 장르적 팬을 보유한 충동의 화신, 칙 코리아와 같은 대가가 재즈 씬에서 또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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