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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6월 25일, 빌 에반스 트리오

작성자 JAZZ PEOPLE(ip:)

작성일 2021-06-22

조회 4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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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병욱


1961년 6월 25일

역사의 점과 선 모두로 남은 날


역사에는 굵직한 획으로 남은 위인이 있고, 빛나는 점으로 남은 사건이 있다. 물론 더러 선과 점으로 모두 남은 이와 날도 있다. 100년의 반환점을 돈 재즈사는 이미 지난 수십년 동안 대가들의 사망 소식 못지않게 최근 위인들의 탄생 100주년 소식도 심심치 않게 전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처럼 출생일이나 사망일처럼 그들과 그들의 음악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날도 있지만, 해당 날짜 자체가 의미를 환기하는 날도 있는 법이다. 1961년 6월 25일의 빌 에반스 트리오가 그렇다. 점이라고 선이라고도 할 수 있고, 숫자로도 의미로도 재즈사 중간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화와도 같은 이 날은 우리에게 정확히 ‘그날’을 기억하고 꿈꾸게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시의 하루를 컷마다 돌려보고 싶게 한다.


‘빌 에반스’라는 이름이 순간 떠오르게 하는 이미지는 사실 한둘이 아니다. 누군가는 정갈하게 빗어 넘긴 그의 헤어스타일과 고개를 푹 숙인 구부정한 연주 자세를 곧바로 상상하겠고, 다른 이는 그로부터 연상되는 내성적인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겉보기만이 아닌 실제 섬세한 톤과 기교가 돋보였던 에반스의 연주나 ‘재즈계의 쇼팽’이라는 별명이 생각날 수도 있고, 그저 연주의 인상만이 아니라 그의 방법론이 재즈사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우선 곱씹는 이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빌 에반스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 가운데 단 하루를 생각해보라면 그의 사연을 아는 이 대부분 같은 날을 떠올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빌 에반스 트리오


1961년 이날로 떠나기에 앞서 시계를 조금만 앞으로 돌려본다. 빌 에반스는 버드 파월 이후 등장한 가장 영향력 있는 피아니스트를 이야기할 때, 혹은 (비록 그가 비밥과 쿨을 모두 넘나들기는 했지만 특히) 쿨 재즈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그날의 역사가 펼쳐진 뉴욕 맨해튼으로부터 가까운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서 태어난 빌 에반스는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 각종 악기를 익히며 고전음악을 공부했다. 10대와 대학 방학 시절에는 지역 밴드에서 연주도 하고, 트리오 및 쿼텟을 결성해 재즈를 깊이 연구하거나 곡을 녹음하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재즈에 진지하게 투신할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글과 그림, 스포츠에 능할 정도로 다재다능했던 그는 대학으로 돌아와 도리어 플루트를 연주하고, 레슨까지 받아 가며 클래식 레퍼토리를 공부했다. 그러나 재즈 외연, 그중에서도 특별히 고전음악을 열정적으로 탐구했던 경험은 훗날 에반스 예술의 독창적 구조와 서정을 이루는 바탕이 된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뉴욕에서 여러 그룹을 전전하던 그의 역량을 알아본 것은 조지 러셀이었다. 러셀은 물론 러셀이 소개한 마일스 데이비스와의 교류를 통해 빌 에반스는 점차 재즈 씬에 이름을 알린다.


스콧 라파로(베이스), 빌 에반스(피아노), 폴 모션(드럼)

빌리지 뱅가드에서


빌 에반스 미학의 존재감과 의의는 그의 초기 오리지널 트리오를 통해 온전히 발현되고 극대화되었다. 먼저 토니 스콧의 앨범 [The Touch Of Tony Scott](1956)에 세션으로 참여해 연주 실력을 인정받은 에반스는 뒤이어 짧은 기간 마일스 데이비스 밴드에 합류하고, 밴드를 나온 후에도 데이비스의 요청에 따라 [Kind Of Blue](1959)에 참여한다. 데이비스에게 모달 재즈에 관한 직접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고, 밴드의 유일한 백인으로서 세간의 논란에도 데이비스에게 중용됨으로써 앞길도 창창했지만 그는 자신의 팀을 원했다. 동시에 피아노 트리오라고 해서 피아노에 종속되거나 반주 역할에 머물지 않는 새롭고 유기적인 팀을 원했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에반스는 베이시스트 스콧 라파로(Rocco Scott LaFaro)와 자신의 첫 번째 리더작부터 함께했던 드러머 폴 모션(Paul Motian)까지 20대 멤버 두 사람을 맞이해 역사적인 날의 트리오를 결성한다.


이들의 만남은 각자의 갈증을 해소할 뿐만 아니라, 서로와 서로의 악기가 무한한 세상으로 나가게 한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와 같았다. 빌 에반스 트리오는 즉흥연주에서 솔로 파트와 반주의 경계를 최대한 약하게 하고, 멤버들 간의 인터플레이의 중점을 두고자 했다. 에반스는 이전까지 재즈 피아노가 단지 관악기 어법을 차용하는 방식으로 발전 중일 때 비로소 그와 구별된 피아니즘을 실현함으로써, 라파로와 모션은 베이스와 드럼이 그저 리듬 섹션이 아니라 멜로디 제시와 인터플레이에 직접 공헌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으로 중요한 진보의 발걸음을 떼었다.



빌리지 뱅가드


그날의 장소도 돌아보자. 몇 년 전, 2018년에 빌 에반스와 같은 뉴저지 출신의 경영자 로레인 고든(Lorraine Gordon)이 2018년에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61년 바로 그날의 역사가 펼쳐진 빌리지 뱅가드(Village Vanguard)의 당시 주인이었던 맥스 고든(Max Gordon)의 아내였으며, 1989년 맥스의 사망 이후 경영권을 이어받은 그였다. 무엇보다 재즈보다 포크 음악을 더 사랑했던 남편의 방향성을 주도해 빌리지 뱅가드를 재즈 공연 및 실황 음반의 산실로 만든 그였다. 1932년 ‘빌리지 페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곳은 처음에는 시인들이 시를 낭송하는 장소로 출발했지만 이후 포크나 카바레 곡을 연주하거나 코미디를 위한 장소로 확대되었다가 로레인에 힘입어 1957년 재즈 전문으로 전환되었다.


맥스 고든 및 그때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회상에 의하면 빌리지 뱅가드가 재즈 전문 공연장이 된 지 얼마 안 된 당시 빌 에반스 트리오는 전혀 유명하지 않았다. 앞서 [Portrait In Jazz](1960), [Explorations](1961)를 발매해 연주자들의 주목을 받고, 빌리지 뱅가드에서 2주간의 연주 기회를 잡았지만, 이들은 헤드라이너였던 보컬 그룹 ‘램버트 헨드릭스 앤 로스’(Lambert, Hendricks & Ross)의 연주 사이를 메우는 백업 밴드에 불과했다. 하지만 뱅가드에서의 밤이 반복되면서 빌 에반스 트리오 연주는 그들이 원하는 미학과 이상에 확연히 다가서고 있었다. 이를 느낀 것은 현장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리버사이드(Riverside Records) 레이블 창시자이자 프로듀서인 오린 킵뉴스(Orrin Keepnews)는 음반 녹음을 종용했고, 녹음은 이들의 뱅가드 공연 마지막 날로 확정되었다.



1961년 6월 25일, 일요일에는 낮 공연도 있는 뱅가드의 전통에 따라 빌 에반스 트리오는 하루 동안 오후 두 차례, 저녁 세 차례 총 다섯 번 무대에 올랐다. 공연 때마다 이들은 네다섯 곡을 약 30분간 연주했다. 첫 번째 무대에서 빌 에반스 트리오가 새로 공개하고, 처음 녹음한 ‘Alice In Wonderland’와 ‘My Foolish Heart’부터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엔딩 곡 ‘Jade Visons’까지. 시종일관 유려했던 이들의 기교와 편안하고 완숙했던 정신적 교감은 두 장의 앨범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1961)와 [Waltz For Debby](1962)를 통해 세상 빛을 보게 되었으며, 이후에 나머지 곡 중 일부가 빌 에반스의 유작인 [More From The Vanguard](1984)에 실리게 되었다.



비극, 그리고 명반의 탄생


그날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61년 7월 6일 늦은 밤이었다. 뉴욕주 북부에 있는 부모님의 고향으로 차를 몰고 가던 스콧 라파로는 한 시골길에서 나무와 충돌했고,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전설적인 공연 후 고작 열흘가량이 지났고, 라파로의 나이 스물다섯 때의 일이다.


어떤 누구의 설명보다도 빌 에반스 자신의 언급이 당시 그의 심경을 가장 잘 묘사한다. “나 역시 그 사건이 곧바로 내게 영향을 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음악적으로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나는 심지어 집에서도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그는 실제로 4개월 이상 연주를 중단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유령처럼 지냈다고 한다. 세 사람이 동등한 무게와 역할로 떠받치던 유토피아의 한 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탓인지 스콧 라파로를 잃은 후 상심을 거듭한 빌 에반스는 폴 모션과도 이별한다. 이미 마약에 조금씩 손을 대던 에반스는 이 사건 이후 형의 권총 자살, 1961년 이래로 12년을 함께한 연인의 자살을 연이어 겪으며 마약에 더욱 깊이 빠져든다. 뱅가드에서의 일요일 이후 20년을 더 살며 꾸준히 음악을 남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빌 에반스의 음악적 이상을, 피아노 트리오의 아름다운 모범을 불과 2년 동안 남긴 4장의 앨범으로 압축되는 초기 빌 에반스 트리오에서 발견한다.



본래 빌 에반스 트리오의 빌리지 뱅가드 공연은 오직 한 장의 앨범으로만 남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스콧 라파로의 죽음으로 인해 상황이 바뀌었다. 먼저 앨범 커버에 ‘Featuring Scott La Faro’라는 부제를 새긴 [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가 라파로의 사망 이후 약 두 달 뒤인 1961년 9월에 발매됐다. 라파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가 작곡한 ‘Gloria’s Step’과 ‘Jade Visions’를 앨범 맨 앞뒤 트랙에 배치했다. 스토리 이면에 담긴 비극적 스토리가 심금을 울리기 때문일까? 비교적 경쾌하고 편안한 ‘Gloria’s Step’과 느리게 침잠하는 ‘Jade Viosions’ 모두 다채로운 코드 변환과 환상적인 인상 가운데 고아한 슬픔이 스며든다.


다음 해 발표한 [Waltz For Debby]를 대표하는 곡은 단연 앨범 제목 동명의 ‘Waltz For Debby’다. 빌 에반스가 작곡한 곡으로, 잘 알려졌듯이 어린 조카 데비(Debby)가 뒤뚱뒤뚱 걷는 모습을 3박자 왈츠 리듬에 빗대 표현한 곡이다. 당시 군 복무를 마치고 부모님 집에 머물며 피아노 연습에 매진할 때 휴식 삼아 형 해리 에반스의 집에 놀러 가곤 했던 그는, 세 살배기 조카를 데리고 해변으로 향했다가 아이가 준 감흥을 곧장 곡에 남겼다. 빌 에반스가 남긴 어록을 굳이 들추지 않고 이 곡만 들어도, 그가 설사 과묵하고 무척 예민한 사람일 수는 있을지언정 마음만큼은 무척 따뜻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첫 리더작 [New Jazz Conceptions](1957)에 피아노곡으로 실렸던 이 곡은 [Waltz For Debby]에 트리오 편성으로 재탄생하면서 빌 에반스의 낭만과 서정, 색채를 직관적으로 들려주는 곡으로 남았다.


재즈 마니아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는 저서 〈재즈 에세이〉(1997)에서 소설가다운 문학적 표현을 통해 빌 에반스 트리오 음악의 양면성을 찬미했다. 그것이 “세계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세계를 날카롭게 도려내는 마음” 두 가지를 동시에 준다고. 드뷔시, 라벨 등 근현대 작곡가들은 전위적인 어법과 감각적인 결과물, 낭만주의를 잇는 유려함과 서정성으로 역사성과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이들로 꼽힌다. 빌 에반스 뒤로 섬세한 감수성과 정서를 연주로 벼려내는 쇼팽의 이름이 뒤따르면서도, 여러 인상주의 대가들의 이름이 함께 오르내리는 것은 단지 파격적인 화성의 사용 및 해석, 표현주의적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즉흥연주와 멤버 사이 호흡이 다른 어떤 음악보다 중시되는 재즈의 역사는 곧 공연의 역사이기도 하다. 빌 에반스 역시 이를 중요하게 생각해 즉흥성과 멤버 간 인터플레이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공연 전 리허설을 하지 않았다. 한 점으로부터 선이 시작되어 그것이 무한히 뻗어가면 이를 반직선이라고 한다. 1961년 6월 25일, 뉴욕 7번가 빌리지 뱅가드에서의 사건은 재즈사에 가장 빛나는 점 중 하나로 남아 빌 에반스 자신의, 재즈 연주자들과 팬들의, 저마다의 모범과 감동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첨부파일 앨범_Sunday At The Village Vanguard.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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